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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블로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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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울 블로벨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친위대 장교로, 아인자츠그루펜의 지휘관으로 활동하며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철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전쟁 후 건축가로 활동하다가 나치당에 가입했다. 그는 동부전선에서 존더코만도 4a의 지휘관으로서 바비 야르 학살을 비롯한 대규모 학살을 조직했으며, 이후 증거 은폐를 위한 존더작전 1005의 책임을 맡았다. 뉘른베르크 군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1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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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블로벨
기본 정보
1947년의 블로벨
1947년의 블로벨
출생일1894년 8월 13일
출생지포츠담, 독일 제국
사망일1951년 6월 7일
사망지란츠베르크 교도소, 서독
사망 원인교수형
범죄 유형인류에 대한 죄
전쟁 범죄
범죄 조직 가입
피해자 수60,000명 이상
범행 시작 시기1941년 6월
범행 종료 시기1944년
범행 장소폴란드, 우크라이나, 유고슬라비아
동기나치즘
SS 경력
군종[[파일:Flag Schutzstaffel.svg|23px]] 슈츠슈타펠
계급SS-슈탄다르텐퓌러
부대아인자츠그루페 C
지휘존더코만도 4a
존더악치온 1005
재판
재판명아인자츠그루펜 재판
유죄 판결사형
죄목인류에 대한 죄
전쟁 범죄
범죄 조직 가입
알려진 범죄빌라체르크바 학살
바비 야르
존더악치온 1005

2. 초기 생애

포츠담에서 태어난 블로벨은 제1차 세계 대전에 공병으로 참전하여 1급 철십자 훈장과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1] 전쟁이 끝난 후 건축을 공부하여 1924년부터 건축 관련 일을 했지만, 1931년에 실업하였다. 이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입당하여 친위대원이 되었고 SD에 배속되었다.

나치 독일의 복지 단체인 "Volkswohlfahrt"가 파울 블로벨에게 발급한 초기 전시 신분증

2. 1.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포츠담에서 태어난 블로벨은 제1차 세계 대전에 공병으로 참전하여 훌륭히 복무했으며 철십자 훈장 1급을 받았다. 전쟁 후 블로벨은 건축을 공부하여 1924년부터 1931년까지 건축가로 활동하다가 나치당, SA, SS에 가입했다(1931년 12월 1일까지 모두 가입).[1]

2. 2. 전후 건축가 활동

블로벨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건축을 공부하여 1924년부터 건축가로 활동했지만, 1931년에 실업한 후 나치당에 입당했다.[1]

2. 3. 나치당 입당

포츠담 출신인 블로벨은 제1차 세계 대전에 공병으로 참전하여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후 블로벨은 건축을 공부하여 1924년부터 1931년까지 건축가로 활동하다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 돌격대(SA), 친위대(SS)에 가입했다(1931년 12월 1일까지 모두 가입).[1]

3. 친위대 경력

SS 제복을 입은 블로벨


1933년 뒤셀도르프 경찰에 입대하여 경력을 시작한 블로벨은 1934년 6월 SD에 채용되었다. 독소전 발발 이후인 1941년 6월,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에서 아인자츠그루펜 C 예하 존더코만도 4a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그의 부대는 바비 야르키이우 등지에서 '정치적·인종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자'들을 총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9] 블로벨은 프리드리히 예켈른과 발터 폰 라이헤나우의 부대와 함께 1941년 9월 말 키이우에서 바비 야르 학살을 조직하여 33,771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5][7]

1942년 1월 13일, 블로벨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건강상의 이유로 지휘관 직에서 공식 해임되었으나, 이는 표면적인 이유였다.[4] 실제로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과 관련된 극비 임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이었다. 1942년 6월, 블로벨은 게슈타포 수장 하인리히 뮐러로부터 동유럽에서 나치가 저지른 만행의 증거를 없애는 비밀 임무인 '존더작전 1005'의 책임을 맡았다. 이 작전에는 집단 무덤을 발굴하고 시신을 소각하는 작업이 포함되었으며, 블로벨은 시신 층을 쇠 레일 프레임 위에 장작과 번갈아 쌓는 효율적인 처리 기술을 개발했다.[4] 1944년 10월에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반 게릴라 부대를 이끌었다.[8]

3. 1. 보안국(SD) 활동

1933년 블로벨은 뒤셀도르프 경찰에 입대했고, 1934년 6월 SD 보안국에 채용되었다.[2] 독소전 개시 후인 1941년 6월, 블로벨은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에서 ''Einsatzgruppe C''의 ''Sonderkommando 4a'' 지휘관이 되었다.[2] ''Einsatzgruppen''과 질서 경찰대대는 소련 내 국방군 전선 뒤에서 유대인을 포함한 정치적, 인종적으로 부적격한 사람들을 학살했다.[2] 1941년 8월, 블로벨은 지토미르에 나치 게토를 건설하여 약 3,000명의 유대인을 수용했고, 이들은 한 달 뒤 학살되었다.[2]

1941년 8월 10일 또는 11일, 프리드리히 예켈른은 아돌프 히틀러를 대신하여 블로벨에게 유대인 전체를 몰살하라고 명령했다.[3] 8월 22일, ''Sonderkommando''는 빌라체르키바에서 유대인 여성과 어린이를 학살했는데, 이는 발터 폰 라이헤나우 제6군 사령관의 동의를 받은 것이었다.[4] SS-''Obersturmführer'' 아우구스트 하프너는 1960년대 재판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4]

블로벨은 라이헤나우와 프리드리히 예켈른의 부대와 함께 1941년 9월 말 키이우에서 바비 야르 학살을 조직하여 33,771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5][7] 1941년 11월, 블로벨은 가스차량을 처음으로 받아 폴타바에서 가동했다.[4]

블로벨은 공식적으로 1942년 1월 13일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건강상의 이유로 지휘관에서 해임되었지만, 이는 정교한 은폐였다.[4] 디터 비슬리체니에 따르면, 블로벨은 폴란드의 절멸 수용소에 대한 가스실의 개념을 개발했다.[4]

3. 2. 아인자츠그루펜 활동



독소전 개시 후인 1941년 6월, 블로벨은 우크라이나에서 '게릴라' 사냥을 하는 아인자츠그루펜 C(사령관 오토 라쉬)에 속하는 존더코만도 4a대의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블로벨 부대는 주로 바비 야르키이우에서 '정치적·인종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자'들을 총살했다.[9]

블로벨은 1942년 1월 13일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건강상의 이유로 지휘관에서 해임되었으나, 이는 정교한 은폐였다. 디터 비슬리체니에 따르면, 블로벨은 이 기간 동안 폴란드의 절멸 수용소에 대한 가스실의 개념을 개발했다고 한다.

1942년 6월, 블로벨은 게슈타포 수장인 하인리히 뮐러로부터 비밀리에 ''존더작전 1005''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 임무는 동유럽에서 나치 만행의 증거를 파괴하는 것으로, 헬름노에서 시작하여 소비보르 절멸 수용소, 아우슈비츠, 크로아티아 독립국, 발트 3국, 세르비아의 수용소로 이어졌고, 결국 바비 야르 학살 현장인 우크라이나로 돌아갔다. 블로벨은 시신 층을 쇠 레일 프레임 위에 장작과 번갈아 놓는 효율적인 처리 기술을 개발했다.[4]

1944년 10월, 그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반 게릴라 부대를 이끌었다. 기타 세레니는 제국 보안 본부의 교회 정보부 부장이었던 알베르트 하르틀과 블로벨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말했다.

3. 2. 1. 유대인 학살

1933년 블로벨은 뒤셀도르프 경찰에 입대했고, 1934년 6월에는 SD 보안국에 채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바르바로사 작전 이후인 1941년 6월, 블로벨은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에서 ''Einsatzgruppe C''의 ''Sonderkommando 4a'' 지휘관이 되었다. ''Einsatzgruppen''과 질서 경찰대대는 소련 내 국방군 전선 뒤에서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학살은 모든 정치적, 인종적으로 부적격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2] 1941년 8월, 블로벨은 지토미르에 나치 게토를 건설하여 약 3,000명의 유대인을 수용했고, 이들은 한 달 뒤 학살되었다.[2]

1941년 8월 10일 또는 11일, 프리드리히 예켈른은 아돌프 히틀러를 대신하여 블로벨에게 유대인 전체를 몰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3] 1941년 8월 22일, ''Sonderkommando''는 빌라체르키바에서 유대인 여성과 어린이를 학살했는데, 이는 발터 폰 라이헤나우 야전 원수 (제6군 사령관)의 동의를 받은 것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SS-''Obersturmführer'' 아우구스트 하프너는 재판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4]

블로벨은 라이헤나우와 프리드리히 예켈른의 부대와 함께 1941년 9월 말 키이우에서 바비 야르 학살을 조직하여 33,771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5][7] 1941년 11월, 블로벨은 가스차량을 처음으로 받아 폴타바에서 가동했다.[4]

독소전 개시 후인 1941년 6월, 블로벨은 우크라이나에서 '게릴라' 사냥을 하는 아인자츠그루펜 C(사령관 오토 라쉬)에 속하는 존더코만도 4a대의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블로벨의 부대는 주로 바비 야르와 키예프에서 '정치적·인종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자'들을 총살했다.[9] 그의 지휘하에 1만 명에서 1만 5천 명이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3. 2. 2. 바비 야르 학살

블로벨은 프리드리히 예켈른과 발터 폰 라이헤나우 부대와 함께 1941년 9월 말 키이우에서 바비 야르 학살을 조직하여 33,771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5][7] 1941년 8월 10일 또는 11일, 프리드리히 예켈른은 아돌프 히틀러를 대신하여 그에게 유대인 전체를 몰살하라고 명령했다.[3]

1941년 8월 22일, 블로벨의 ''존더코만도''는 빌라체르키바에서 유대인 여성과 어린이를 학살했는데, 이는 야전 원수 발터 폰 라이헤나우 제6군 사령관의 동의를 받은 것이었다. 1941년 11월, 블로벨은 가스차량을 처음으로 받아 폴타바에서 가동했다.[4]

제국 보안 본부의 교회 정보부 부장이었던 알베르트 하르틀은 1942년 키이우에서 블로벨과 나눈 대화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3. 2. 3. 가스차량 사용

1941년 11월, 블로벨은 가스차량을 처음으로 받아 폴타바에서 가동했다.[4]

3. 3. 지휘관 해임

블로벨은 1942년 1월 13일 공식적으로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건강상의 이유로 지휘관에서 해임되었다.[4]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이유였고, 실제로는 더 복잡한 배경이 있었다. 블로벨은 병원에 있는 동안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방문을 받았고, 프라하에서 영국 훈련을 받은 체코 레지스탕스에 의해 하이드리히가 치명상을 입은 후 중단된 것으로 추정되는 극비 임무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디터 비슬리체니에 따르면, 블로벨은 폴란드의 절멸 수용소에 대한 가스실의 개념을 개발하기도 했다.[4]

3. 4. 1005 작전

1942년 6월, 파울 블로벨은 게슈타포 수장 하인리히 뮐러로부터 동유럽에서 나치가 저지른 만행의 증거를 없애는 비밀 임무인 '존더작전 1005'의 책임을 맡았다.[8] 이 작전은 헬름노에서 시작하여 소비보르 절멸 수용소, 아우슈비츠, 크로아티아 독립국, 발트 3국, 세르비아의 수용소를 거쳐 바비 야르 학살 현장인 우크라이나까지 이어졌다.[8]

1005 작전에는 집단 무덤을 발굴하고 시신을 소각하는 작업이 포함되었다. 블로벨은 시신 처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시신 층을 쇠 레일 프레임 위에 장작과 번갈아 쌓는 방식을 개발했다.[4]

3. 4. 1. 효율적인 시체 처리 기술 개발

블로벨은 시신 처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시신 층을 쇠 레일 프레임 위에 장작과 번갈아 쌓는 방식을 개발했다.[4] 1942년 6월, 게슈타포 수장 하인리히 뮐러는 블로벨에게 동유럽에서 나치의 만행 증거를 없애는 비밀 임무인 존더작전 1005의 책임을 맡겼다. 이 작전은 헬름노에서 시작해 소비보르 절멸 수용소, 아우슈비츠, 크로아티아 독립국, 발트 3국, 세르비아의 수용소를 거쳐 바비 야르 학살 현장인 우크라이나까지 이어졌으며, 집단 무덤 발굴 및 시신 소각 작업이 진행되었다.[8]

3. 4. 2. 유고슬라비아 활동

1944년 10월, 블로벨은 유고슬라비아에서 반 게릴라 부대를 이끌었다.[8] 기타 세레니는 제국 보안 본부의 교회 정보부 부장이었던 알베르트 하르틀과 블로벨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말했다.[8] 하르틀은 1942년 키이우의 어느 더운 여름날 저녁, 지역 고위 SS 경찰 책임자이자 여단 지도자인 막스 토마스와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는데, 동료 손님인 SS 대령 파울 블로벨이 그를 장군의 주말 별장으로 데려다 주었다고 한다. 하르틀은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긴 협곡을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땅의 이상한 움직임을 알아차렸다. 덩어리진 흙이 자체 추진력으로 공중으로 솟아올랐고 연기가 났다. 그것은 낮은 톤의 화산과 같았다. 마치 땅 밑에 타오르는 용암이 있는 것 같았다. 블로벨은 웃으며 팔을 흔들어 길을 따라, 그리고 앞쪽, 바비 야르 학살 협곡 전체를 가리키며 '여기에 내 3만 명의 유대인이 누워 있다.'라고 말했다."라고 회상했다.[8]

4. 재판 및 처형

블로벨은 59,018명 이상의 살인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10,000~15,000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미국 뉘른베르크 군사 재판의 아인자츠그루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1년 6월 7일 자정 직후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6]

사형 집행 직전의 블로벨

4. 1. 아인자츠그루펜 재판

블로벨은 1948년 4월 10일 아인자츠그루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블로벨은 59,018명 이상의 살인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10,000~15,000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미국 뉘른베르크 군사 재판의 아인자츠그루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1년 6월 7일 자정 직후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6]

전후 미군이 연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의 아인자츠그루펜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다. 1951년 6월 8일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오토 올렌도르프, 오스발트 폴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마지막 말은 "나는 우리 국민의 신념 속에서 죽는다. 바라건대 독일 국민이 이것의 적을 깨닫기를!"이었다.[10]

4. 2. 처형



블로벨은 59,018명 이상의 살인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10,000~15,000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미국 뉘른베르크 군사 재판의 아인자츠그루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1년 6월 7일 자정 직후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6]

전후 미국군이 연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의 아인자츠그루펜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1951년 6월 8일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오토 올렌도르프, 오스발트 폴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마지막 말은 "나는 우리 국민의 신념 속에서 죽는다. 바라건대 독일 국민이 이것의 적을 깨닫기를!"이었다.[10]

5.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 T. P. 맥케나는 1978년 미니시리즈 홀로코스트에서 블로벨을 연기했다.
  • 케네스 콜리는 허먼 워크의 소설 전쟁과 기억을 바탕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 전쟁과 기억에서 블로벨을 연기했다.

참조

[1] 서적 The Encyclopedia of the Third Reich Macmillan
[2] 서적 Les Einsatzgruppen Tallandier
[3] 서적 Les Einsatzgruppen
[4] 서적 The Years of Extermination: Nazi Germany and the Jews, 1939–1945 HarperCollins
[5] 서적 The Origins of the Final Solution: The Evolution of Nazi Jewish Policy, September 1939 – March 1942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6] 서적 Adenauer's Germany and the Nazi Past: The Politics of Amnesty and Integration https://archive.org/[...] Columbia University Press
[7] 웹사이트 1941: Mass Murder http://www.holocaust[...]
[8] 서적 Into That Darkness: From Mercy Killing to Mass Murder https://books.google[...] Pimlico
[9] 웹사이트 1941: Mass Murder http://www.holocaust[...]
[10] 웹사이트 http://www.ti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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